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거나 결말을 원치 않는 분들은 이 글을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
<일루셔니스트>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등을 만든 실뱅 쇼메 감독이 연출한 프랑스 애니메이션으로, 첫 시작은 1959년 파리를 배경으로 어느 늙은 마술사가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흑백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무성 영화 시대의 흑백 필름을 보는 듯한 느낌으로 막을 연 이 영화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며 화면에 색을 입혀 나갑니다.
점점 인기가 시들해지며 설 곳을 잃어가는 나이 든 마술사(일루셔니스트)가 이 작품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공연을 하지만, 식상한 레퍼토리와 시대에 뒤떨어진 공연으로 관객들의 외면을 받기 일쑤입니다. 그의 가족이라곤 공연 소품으로 쓰이는 성질 사나운 토끼 한 마리가 전부입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담담히 자신이 할 일만 성실히 해나가는 마술사의 모습은 오히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애잔한 감정에 빠져들게 합니다.
밴드의 공연 뒤 짧은 막간의 시간을 이용해 마술을 보여주려고 몇 시간이나 대기하고 있다가 겨우겨우 무대에 섰지만 이미 관객은 다 빠져나가고 텅 빈 객석에는 손자와 할머니 한 분이 전부입니다. 꼿꼿하게 턱을 치켜들고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자신의 공연 포스터를 챙겨 또 다른 일터를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마술사는 한 마디 대사도 내뱉지 않지만 보는 이들은 이미 목이 메어오는 듯한 울컥거림과 복잡한 감정들을 뒤집어쓴 기분이 됩니다.
멀고 먼 스코틀랜드의 외딴 섬까지 흘러들어간 마술사는 참으로 오랜만에 자신을 반겨주는 관객들 앞에서 만족스러운 공연을 펼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연인지 악연인지 모를 한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주점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앨리스란 소녀는 마술사의 공연에 푹 빠져버렸고, 마술로 만들어 내는 환상을 진짜라고 믿고 있습니다. 마술사가 소녀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아 마술을 이용해 닳아빠진 비누를 새 것으로 바꿔주고, 소녀의 너덜너덜 헤진 신발을 새 구두로 바꿔줄 때도 소녀는 이것을 요술이라고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마술사가 섬을 떠나 다시 도시로 돌아갈 때 소녀는 몰래 마술사를 따라 나섭니다. 본의 아니게 소녀의 보호자가 된 마술사는 소녀와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세상 물정 모르고 환상에 빠져사는 철 없는 시골 소녀는 화려한 도시에 흠뻑 빠져 점점 원하는 게 많아져 갑니다. 새 외투와 구두, 원피스... 소녀가 시골티를 벗고 도시의 허영을 몸에 두르게 될수록 마술사의 지갑은 텅텅 비어가고, 어쩔 수 없이 투잡을 뛰어야 하는 처지에 이릅니다. 마술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늙은 마술사가 실수 투성이로 고군분투하는 동안 굽은 어깨가 더더욱 쳐져 가는 모습은 딱하기 그지 없습니다.
도시로 흘러들어온 수많은 실패자들, 더이상 시대가 원하지 않는 곡예사, 인형술사들이 더이상 자신의 본분을 지키지 못하고 도시 하층노동자가 되거나 노숙자로 전락하는 모습들이 무거운 침묵 속에서 마치 별 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일이 긍지이자 자부심이었던 늙은 마술사도 버티고 버티다 결국 손을 들어버리는 날이 오고 맙니다.
'세상에 마법사는 없어'라는 쪽지와 선물을 남긴 채 늙은 마술사는 소녀의 곁을 떠납니다. 단지 장소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더이상 마술사로 살아가기를 그만둔 것입니다. 그의 유일한 가족이자 생계수단이었던 토끼를 자연 속에 풀어주는 장면은 먹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마술사가 떠난 뒤 도시의 중고 가게에는 마술사가 애지중지 지니고 다니던 마술도구들이 쓸모없어진 고물처럼 쓸쓸히 진열되어 있습니다. 도시의 불이 하나둘씩 꺼져갈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던 한 줄기 희망마저 사라지는 기분이 듭니다. 아주 희미하고 작은 불빛 하나만을 남긴 채 도시는 적막 속으로 잠겨들어갑니다.
이 영화는 아주 최소한의 몇 마디 대사를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무성영화처럼 등장인물의 표정과 미세한 동작들, 도시의 화려하면서도 쓸쓸한 거리와 아름답지만 적막한 시골 풍경, 그리고 침묵의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강렬한 음악만으로 관객들의 마음 깊은 곳을 울리며 긴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일루셔니스트>는 프랑스의 찰리 채플린이라 불리던 코미디의 거장 자크 타티가 남긴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만든 작품이라고 합니다. 늙은 마술사가 남자와 함께 있는 소녀를 피해 극장으로 숨어들어갔을 때 상영관에 등장한 실사 인물이 바로 자크 타티입니다. (자크 타티를 기리기 위해 만든 영화이기에 이 마술사의 이름은 타티셰프입니다.)
손으로 한 장 한 장 그린 듯한 삽화같은 배경들과 서정성이 듬뿍 담겨 있는 색감들, 시대적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품 하나까지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강한 매력이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더이상 필요없어진 구시대 유물들의 쓸쓸한 퇴장, 환상을 좇으며 불나방처럼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무모한 젊음들, 소중한 사람들의 미래를 지켜주려고 애쓰다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린 아버지들의 몰락, 하지만 삶은 계속되기에 포기하지 않고 미지의 세계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딘 사람들의 실낱같은 희망들이 열린 결말 속에서 가시지 않는 먹먹함과 쓸쓸하고 긴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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