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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 이야기/만화

[만화]바사라-바람과 같은 인생을 살다 간 아게하

by R&X 2018.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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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타로트 카드를 알게 된 건 '소년탐정 김전일'을 본 이후이다. '타로트 카드 살인사건' 편에서 카드에 그려진 그림대로 살인이 일어나고, 결국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 그려져 있는 카드가 단서가 되어 범인을 밝혀내는 스토리였다. '나의 카드는 항상 거꾸로 매달려 있는 남자.. 그 의미는 희생과 시련과 보상받지 못하는 사랑...' 이것이 바사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인 '아게하'를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인 것 같다.  

긍지높은 사막의 유목민이었지만 어렸을 때 귀족집안의 노예로 들어간 아게하는 이름조차 불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No 31'로 천대를 받게 된다. 그는 귀족으로부터 온갖 학대와 고문을 당했고, 밤마다 성적 노리개로 유린되기도 했다. 귀족의 아들인 '시도'는 아버지와는 달리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뜻을 두고 있었던 야심차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으로서 '아게하'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푼다. 하지만 아게하는 자신의 비참함만큼 '시도'의 호의를 거부하고 그들을 저주하고 증오하며 자라게 된다. 등에 찍힌 노예의 낙인은 아게하를 구속하는 족쇄가 되고 있었고, 그는 어두운 성장기를 통해 '바람과도 같은 자유'를 갈망하게 되고 실제로 그는 훗날 바람과도 같은 삶을 살게 된다.

'시도'의 집에서 벗어난 아게하는 어느 떠돌이 극단에 들어가게 된다. 어릴 때 겪은 성적 학대로 인해 사람의 접근을 꺼리고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갖게 된 아게하는 극단의 어느 여자 무용수가 포용력 있게 그를 감싸줌으로써 한 남자로서 여자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극단에 있는 동안 점쟁이로부터 '목숨을 걸만한 운명의 여자'를 만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 그는,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는 그 날까지 조용히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사막에서 적왕의 군대에게 쫓기는 어린 소녀 '사라사'와 만나게 되고 직감적으로 그녀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운명의 지도자'이며 자신의 '운명의 상대'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적왕의 군대 앞에 철없이 나섰나가 노여움을 사서 징벌을 받게 된 '사라사'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다 아게하는 왼쪽 눈을 잃게 된다. '사라사'와 아게하의 첫 만남은 이렇게 '희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게하는 항상 어깨에 전서구 역할을 하는 올빼미를 데리고 다니는데, 그 올빼미의 이름은 '카케로우'라고 했다. 길거리에서 쇠사슬에 묶여 호객 행위나 하는 신세로 전락한 올빼미를 자신의 신세에 비유하며 날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게하는 어느 날 그 올빼미가 새끼를 낳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올빼미는 자신의 새끼 중 한마리를 발로 차서 아게하 앞에 떨어 뜨린다. 족쇄를 찬 올빼미가 되지 않도록 자기 새끼를 아게하에게 맡긴 것이다. 아게하는 그 올빼미의 이름을 '카케로우'라고 지었고, 창공을 향해 높이 날 수 있는 카케로우처럼 아게하 또한 어느 곳에도 구속되지 않은 채 유유히 떠돌며 자신이 활약할 그 때를 기다린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사라사가 어엿한 숙녀로 성장했을 무렵, 적왕의 군대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운명의 지도자로 예언된 소년, 타타라'를 죽이기 위해 사라사의 마을을 침략한다. 타타라는 사라사의 쌍둥이 오빠로, 어렸을 때부터 왕권의 억압과 박해를 받아온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자 푯대로 떠받들어지며 성장했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사라사는 부모의 따뜻한 관심도 별로 받지 못한 채 '자기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고뇌를 안고 약간은 불우하게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적왕의 오른팔인 카잔 장군에 의해 타타라는 어이없이 목숨을 잃고 만다. 타타라의 목이 거리에 보란 듯이 걸리게 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하게 되고, 사라사가 자란 백호 마을은 불길에 휩싸여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사라사는 '타타라'만이 그들을 파멸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길고 고운 머리를 싹둑 자르고 그 순간부터 타타라의 대역을 맡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사라사는 예언자에 의해 점지된 운명의 지도자가 오빠인 '타타라'가 아닌 바로 '사라사' 자신이었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예언자인 '나기'는 사라사가 자신의 운명대로 타타라가 되는 걸 보면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이렇게 여자의 몸으로 '부패한 왕권에 대항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과업'을 짊어지게 된 사라사는 숙명의 두 남자, 적왕 슈리와 아게하와도 대면을 하게 된 것이다.

아게하는 타타라의 운명을 짊어진 사라사 곁에서 더이상 다가가지도 물러서지도 않고 일정한 거리에서 관망하듯 지켜보면서 자립심과 의지를 길러주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해주게 된다. 푸른 옷에 검은 안대를 한 아게하는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바람처럼 훌쩍 길을 떠나곤 하는데,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인답게 여기저기 중요한 요소에 있는 인물들과도 친분관계가 있어 사라사가 위험에 처하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도움을 주기도 한다. 

적왕의 사촌이자 오른팔의 역할을 하는 시도는 아게하가 증오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사모하는 친구로서, 아게하는 시도가 말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은 시도 편이 아니라 타타라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게하는 시도와는 정반대 노선을 걷게 된다. 결국 시도는 타타라의 친구이자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하야토의 활에 맞아 목숨을 잃고 만다. 아게하는 시도의 아내인 센쥬를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또 한명의 운명으로 여기고 거친 세파 속에서 센쥬와 시도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도 한다. 

아게하는 타타라에겐 엄한 조언자이자 흔들림없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지만, 여자로서의 사라사에겐 깊은 애정과 헌신을 간직한 남자였다. 백호, 청룡, 주작, 현무의 검을 모아 혁명을 일으킬 세력을 모으고 있던 사라사는 현무의 검을 가진 후예들과 손을 잡기 위해 길을 떠났다가 뜻하지 않게 아바시리 형무소에 감금 되기에 이른다. 아게하와 적왕의 이복형제인 창왕 아사기와 함께 남자들만 수감된 지옥과도 같은 감옥에 들어가게 된 사라사는 신고식을 치르려고 하는 수많은 죄수들의 무리 속에서 공포에 젖게 되나 아게하의 희생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죄수들의 우두머리에게 자신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면서 사라사를 건드리지 말라고 요구한 아게하는 사라사의 눈을 가리며 이런 말을 한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아무 것도 신경쓰지마. 내 인생은 원래 이런거야. 반드시 지켜줄테니 안심해"라고. 사라사는 구석에서 아게하가 당하는 걸 보지 않기 위해 얼굴을 파묻고 앉아 통한의 눈물을 삼킨다. '내가 아게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도움이 필요하면 반드시 도우러 간다'라고 다짐하는 사라사지만, 결국 사라사는 아게하에게 늘 받기만 할 뿐, 그는 죽는 그 날까지 사라사를 위해 희생을 하게 된다. 

사라사는 자신이 사랑하게 된 슈리의 정체가 바로 백호 마을을 몰살시킨 주범이자 자신이 제거해야 할 원수인 적왕임을 알게 되었을 때 세상과 자신을 격리시킨 채 자폐 증상에 빠지고 만다. 그 때 아게하는 사라사를 데리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 그녀를 다시 회복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사라사는 자포자기 상태였고, 그 어느 것에도 무관심한 상태였다. 아게하는 어쩌면 이대로 사라사는 여자로서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사라사는 내버려둔 채 발길을 돌리고 만다. 사라사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치려고 한 아게하는 그의 삶의 목적이자 전부였던 사라사를 등지면서 한 줄기 슬픈 눈물을 흘리고 만다. 

하지만 결국 사라사는 다시 일어섰고, 애초부터 복수를 위해 타타라로서 움직였던 자신을 버리고 오직 평등하고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희망찬 각오와 소망을 이루기 위해 거센 혁명의 물결에 불을 당긴다. 타타라가 각지의 세력을 모아 혁명을 완성하려 할 때 아게하는 "어두운 부분은 내게 맡기고 타타라. 넌 태양 아래를 걸어라."는 말을 하며 스스로 암살자가 되어 방해 세력을 제거하는 어둠의 역할을 전담하게 된다

왕족의 타락과 시대의 변화,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함을 깨닫게 된 적왕 슈리는 부패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고, 자신이 사랑한 여인, 사라사가 타타라로서 그 임무를 완성할 수 있도록 스스로 왕가를 몰락시킬 계획을 세운다. 누이이자 백왕인 긴코 곁에서 그림자처럼 수행하던 남자와 마지막 승부를 가리다가 한 팔을 잃은 슈리는 타타라의 휘하에 연금되어 상처를 치료받게 되지만, 이복형제인 창왕 아사기가 아버지와 백왕이 있는 궁으로 돌아가 왕가를 이어받게 되자 사라사와 슈리는 다시 궁으로 잠입한다. 

하지만, 아사기는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 나가는 과정에서 어려움과 시련이 닥쳤을 때 왕족의 지배를 받던 그 때를 그리워하지 않도록 쓰레기같던 왕가를 철저히 무너뜨리기 위해 왕좌를 계승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슈리와 사라사가 궁에 도착했을 때 지하에는 그 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고,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아게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지하로 들어간다. 카케로우와 마지막 작별을 하며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리라고 편지를 띄운 아게하는 자신의 운명이 이곳에서 끝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구시대의 잔당들에게 칼부림을 당하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하던 아게하는 사라사 일행이 무사히 성을 빠져나갈 때까지 기둥을 붙잡고 안간힘을 쓴다. 사라사 앞에 영혼이 되어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고한 아게하는 무너지는 성밑에서 주인을 찾아 다시 돌아온 카케로우와 함께 바람과도 같던 자신의 인생을 마감한다.

나중에 아게하의 죽음을 알고 사라사가 절규하며 땅을 할퀴듯 파내지만, 사라사의 힘으로는 아게하의 시신조차 거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라사에게 '빚진 건 아무것도 없다. 이미 다 갚았다..'라고 말하며 주기만 하는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었던 아게하의 얼굴에는 평온한 미소가 번져갔다. 아게하는 그렇게 자신의 운명대로 사라사를 끝까지 지킨 뒤 센쥬에게도 영혼이 되어 마지막 작별을 고한 뒤 그렇게 조용히 떠나갔다. 

운명의 상대라고 하면 흔히 남녀가 맺어지는 것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대개 만화에서는 '운명의 상대'가 '결속과 희생'이라는 관계로 맺어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아게하와 사라사의 경우도 그렇고,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도 운명의 상대가 등장하지만, 그들도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로서의 상대들이 아니라 일생의 어느 순간에서 예사롭게 지나치지 않고 반드시 만나야 할 '숙명의 대상'으로서 맺어지게 되는 경우라고 보는 게 더 맞다. 레 마누와 라헬, 샤리와 미카엘의 관계가 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미카엘은 아게하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주는 사랑을 베풀며 결국 목숨까지 바친다는 점에서 역시 '거꾸로 매달린 타로트 카드'를 쥐고 있는 자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주기만 하는 사랑이 숭고한 것인지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어느 쪽이든 쌍방이 아닌 일방으로 통하는 사랑은 부모의 사랑을 제외하고는 바람직하다고 보는 편이 아니다. 사랑을 받는 입장이든, 주는 입장이든 어떤 입장에 놓여있더라도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포함되어 있으면 감정과 진실이 왜곡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바라보는 자의 눈빛은 속이 깊으면서도 언제나 쓸쓸하기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 푸른 빛이 도는 그의 의상 때문이었을까? 처음 등장했던 순간부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게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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